사람들

HOME > 뉴스 > 사람들

<인물탐방>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국회의원

신안이 낳은 목포 천재 천정배, 그의 삶과 역정 ‘나의 노선’ 펴내

작성일 : 2020-09-17 14:06

 

신안이 낳은 목포 천재 천정배, 그의 삶과 역정 나의 노선펴내

그의 노선, 구부러졌는지, 곧았는지, 올바랐는지 진솔하게 말해

 

 

길을 갈 때는 좌표가 필요하다.

내 고향 개펄 어귀에 해마다 적도에서 찾아오는 뱀장어는 어디에 나침반이 들어 있길래 잊지도 않고 고향으로 회유하는 것일까.

 

강릉 남대천의 연어는 무엇이 그리워서 자신이 부화했던 모천으로 돌아와 몸을 온통 바위에 짓찧으면서 죽어가는 것일까.

 

나는 언제 좌표를 얻었고, 나의 나침반은 어떤 것이었을까. 살아오면서 나는 묻곤 하였다. 그리고 그 좌표에서 어긋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왔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차를 타고 갈 때 생기는 어지럼증을 멀미라고 한다. 멀미를 앓으면 자칫 길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노선은 그 멀미를 막을 수 있는 지혜이자 용기이고, 그 길의 궤적이다. (……)

 

이 책은 나의 노선에 관한 이야기다. 나의 노선이 구부러졌는지, 곧았는지, 올바랐는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읽는 이의 몫이다. 다만 나는 나의 길, 나의 노선에 관해 이 책에서 진솔하게 말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눈이 내린다. , 다시 길을 떠나자.

 

천 장관이 지난 20201, 그의 삶과 정치 역정을 펴낸 나의 노선중에서 머리말의 부분이다.

 

-천정배는

 

1954121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에서 2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목포시의 공무원이었기에,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전남 신안의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목포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목포시에서 부모와 살게 됐다. 목포중학교 재학 중에 전라남도 학술 경시 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 졸업 후 명문 목포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목포고를 수석 졸업하면서 그해 대학예비고사에서 인문계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등 이때부터 '목포 3대 천재' 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서울법대 재학중인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 뒤 사법연수원을 3등으로 수료하였으며, 군 복무는 공군 군법무관으로 대위로 전역했다. 통상적으로는 판검사를 받을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군 복무 중 5.18 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전두환 정권하에서 법관 임용을 거부하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무려 제15대에서 20대까지 6선을 지낸 중진 국회의원이며,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천정배 장관은 사법고시에 합격한 수재였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법관 임용을 단호하게 거부했으며, 대통령 경선에 나선 노무현의 진가를 깨닫고 먼저 합류한 동료 이낙연 민주당 대변인과 함께 노무현 캠프에 합류, 법률 분야 의견을 내는 한편, 호남 지역에서 노무현 후보 지지를 확보하는데 진력해 참여정부 탄생 1등 공신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법무부장관으로 중용됐다.

여전히 옛 모습을 띄는 동교동계의 공천 방식을 바꿔보고자 '정풍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국민경선제와 상향식 공천제의 도입을 주도했다.

이후 대연정 제안 등 "(주류)언론에 의해", 정부의 시책에 부정적인 색채가 끊임없이 칠해져 대통령 선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몇몇 정부 인사들이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 한다'며 부화뇌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 만신창이가 된 열린우리당의 쇄신을 외치며, 대통합민주신당으로의 재창당을 이끌기도 했다.

 

-변호사 활동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중 1인으로 활동했다. 1993년 법무법인 해마루를 설립했고, 거기에 노무현과 전해철 등을 참여시켰다. 그 후 법조계에서 인권문제와 노동문제 등에 관해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음반 사전심의제를 위헌이라 규정한 94헌가6 재판의 담당변호사로 활약한 전적이 있다.

전 법무부장관인 조국이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조국의 변호인을 맡은 바 있다.

 

-정치 활동

 

1.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

 

김대중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본격적인 정계활동을 시작했으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기도 안산시 을 지역구로 당선되었고 이래 같은 지역구(안산시 을, 안산시 단원구 갑)4선을 기록하였다.

정동영, 신기남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 정풍운동을 주도, 정권 실세였던 권노갑의 2선 후퇴를 주장하는 등, 당내 소장파 의원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국민의 정부와 핵심 지지층이 갖고 있던 고민 중 하나가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호남 출신 대권 주자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는데, 정동영, 신기남 등과 더불어 지금 당장의 중량감은 떨어지더라도 잘 성장하면 호남권 대권 주자, 즉 뉴 DJ가 될 수 있으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젊은 지지층에 천정배가 갖고 있던 스마트하면서도 강력한 개혁적 성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면이 있다.

20017월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깜짝 지지 의사를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현역 국회의원은 천정배 의원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얼마 안 가서 노무현이 급격히 세를 불려가며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되고, 대선 승리까지 이루어내자, 그의 혜안을 많은 사람이 다시 보게 되었다. 2002년 중반에는 노무현이 민주당 내에서 사실상 지도력을 상실하고 후단협에 의해 흔들리는 등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에도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이 노무현을 계속 도와줘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국면에서는 기존의 지역구도를 타파하고 전국 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섰다.

민주당 내에서 지역구도에 기생하며 점차 보수화, 기득권화하고 있는 동교동계에 맞서서 새로운 세력을 중심으로 깨끗한 진보정치를 실현하겠다는 그의 구상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었다.

 

2. 열린우리당 시절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탄핵열풍을 타고 국회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하자, 천정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 기세를 몰아 3선이었던 그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5선의 이해찬을 꺾고 승리하며 17대 국회 첫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되었다. 단독 과반을 차지한 집권여당 원내대표가 된 이 시절이 천정배 정치인생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천정배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라는 절정에서 정작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에 한계를 드러내며 급격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17대 국회가 시작하자마자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과거사청산법 제정, 언론개혁법 제정을 밀어붙인 것이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4대 개혁 입법을 가리켜 4대 국론 분열법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군 출신, 관료 출신의 보수성향 인사들이 4대 개혁입법에 협조를 해주지 않는 등 자중지란 콩가루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4대 개혁 입법은 여야간에 적당히 타협되어 누더기 법으로 전락했다.

예를 들어 시장 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공정거래법상 규제를 도입하는 것을 뼈대로 한 신문법은 1개 일간지의 시장점유율이 30% 이상이거나 3개 일간지의 점유율이 60%를 초과할시 규제를 가한다는 규정이 삭제되고, 신문지면에서 광고 비율이 50%를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는 규정이 삭제된 채 통과되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언론개혁은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

그나마 국가보안법은 독소조항만 제거하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게 좋았을턴데, 강성 의원들이 "완전 폐지가 안 될 바엔 차라리 그냥 두는 게 낫다"고 주장해 그대로 존치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과거사청산법의 통과도 무산되었다. 열린우리당 일각에서는 이런 소모적인 이념논쟁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일단은 민생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주력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천정배 원내대표가 당내 강성 의원들에게 밀려 4대 개혁입법에 올인하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다.

결국 4대 개혁입법 제정에 실패하고, 당내 리더십도 상실하자, 200511일 원내대표 직에서 사퇴하였다. 열린우리당이 보수층에서 공격을 받는 것 이외에 진보층과 중도층에서도 지지를 상실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쯤부터였다.

20056월에는 법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런데 200510월에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수사를 두고 검찰과 대립한다. 강정구가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으로 표현한 것과 관련해 검찰이 구속수사를 시도하자 천정배는 헌정사상 최초로 검찰청법 8조에 근거해 수사지휘권을 행사하여 불구속수사 지시를 내렸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수사지휘권 행사에 항의하여 총장직을 사퇴했다. 보수층을 중심으로 민심 또한 급격하게 악화됐다.

과거 검찰의 독립을 위해 법무부장관의 검찰에 대한 지휘권을 삭제하는 내용의 검찰청법 개정안을 제안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작 자기가 법무부 장관이 되자 소신이 바뀌었다는 비판을 들었다. 다만 천정배는 법리상 구속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검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김종빈과 합의 하에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는데, 돌연 검찰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참여정부에 대한 염증이 가속화되고, 열린우리당 역시 집권 동력이 상실되며 호남에서조차 비토되는 상황에 이르자, 20071월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했다. 탈당 후 김근태와 더불어 한미 FTA 반대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3. 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 시절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이 출범한 뒤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컷오프 되었다. 대선 과정에서는 문국현과의 정책 연대를 구상하는 등, 반한나라당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2008년 총선에서 4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주로 이명박 정부의 언론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2009년 미디어법이 한나라당에 의해 날치기로 강행 처리되자, 장외 활동에 앞장 섰다. 이 기간에 쌓인 12천만 원의 세비 수령을 미련 없이 거절하여, 많은 사람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후 2010년 민주당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5위를 차지, 최고위원이 되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의 결과로 사퇴, 서울시장이 공석이 되자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박영선 의원에게 패하며 후보가 되진 못했다.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에 출마해서 단 3% 차이로 낙선했다.

 

4. 호남정치의 복원작업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다. 이후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하여 새정치민주연합 조영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탈당 후 천정배가 내세우는 것을 요약한다면 야권 내 '영남패권주의' 타파를 통한 '호남정치의 복원'인데, '호남정치'의 파괴 원인으로 지목 받는 게 천정배가 주도한 바 있는 열린우리당 창당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또한 이를 두고 호남 지역주의로 비판하는 시각이 있기도 한 상태. 현실론적 시각에서 이전에 비해 호남권의 인구가 충청권보다 적어진 현실에서 호남으로 영남을 견제한다는 논리가 성립 가능한가 하는 비판도 있다.

이후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국민의당과 합당하며 손을 잡았다. 국민의당 창당대회에서 안철수와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5. 국민의당 시절

 

201621일 국민의당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3월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대표가 야권 표 분산으로 새누리당이 어부지리를 얻어 4.13 총선에서 압승하는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야권 통합론'을 제시하자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안철수 상임대표가 야권 통합에 완강한 반대 의사를 보이자 잠시 안 대표의 뜻에 따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 현 야권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 310일에는 야권 연대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중대 결심'을 내리겠다며 국민의당 탈당을 불사할 뜻도 있다는 생각을 드러내 배수진을 쳤다.

그렇게 한동안 당무를 거부하기까지 하면서 안철수 상임대표와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뜻을 접고 안철수와 손을 잡았다. 이에 천정배 의원이 창당했었던 국민회의의 탄생에 적극 일조했었던 천 의원의 외곽 조직인 '새로운 길'은 천정배 의원과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4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양향자의 강력한 도전을 뿌리치고 광주 서구 을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629일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김수민·박선숙 의원과 왕주현 사무부총장 등이 연루된 4·13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수수 의혹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그의 대표직 사퇴는 사실 대단히 큰 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 안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국민의당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천정배 의원이 장관까지 지낸 중진급의 정치인인데도 불구하고 안철수 대표에게 눌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 두고 '국민의당 대표는 안철수 한 명 아니냐', '안철수 옆에 앉아 있는 건 천정배가 아니라 천정배 모양으로 깎은 나무 토막 아니냐'며 조롱하기도 했다.

2016122719대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내 경선이 안철수 전 대표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중심으로 돌아가자 2017314일 불출마로 결정했다.

국민의당이 대선에서 패배하고, 대선 공작 사건으로 심각한 치명상을 입은 가운데, 712일 국민의당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81일 대전광역시 충무체육관에서 정식으로 당대표 경선 출마 선언을 했다. 그러나 827일 전당대회에서 16.60%를 득표해 3위에 그쳤다.

 

6. 민주평화당 시절

 

민주평화당 창당 이후, 당 원내대표로 점 찍어진 모양. 다른 의원이나 당원들은 밀어주는 추세인데, 장본인이 꺼려하고 있다. 결국 원내대표는 유성엽 의원으로 결정. 2019812, 대안정치연대 구성을 명분으로 전격 민주평화당을 탈당했다.

 

 

7. 대안정치연대 ~ 대안신당 ~ 민생당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 서구 을 민생당 후보로 출마하여 7선을 노렸으나 더불어민주당 양향자 후보에게 패하며 낙선했다.

2020620, 국회 마지막 급여 850만원을 서구에 기탁했다.

 

 

 

사람들 이전 기사

  • 이전 기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