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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전 전남지사 “기자들은 왜 팩트대로 쓰지 않나”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큰 획 그은 정치인임에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아

작성일 : 2020-12-29 14:07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는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지난 2004년 보궐선거에서 전남지사로 당선된 뒤 내리 3선을 했다.

 

이후 영암·무안·신안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으나 뜻하지 않게 도중 하차했다.

 

그러나 서슬 퍼런 군부독재 등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큰 획을 그은 정치인임에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떨렸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2000년 6월 15일.

 

분단 55년 만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했던 박준영 전 청와대 대변인.

 

그는 저서 『평화의 길』에서 “두 정상이 가까스로 합의한 공동선언을 발표하기 위해 자정 시간에 만찬장에서 기자들이 있는 고려 호텔로 향하는 차 속에서, 손에 쥔 선언문이 땀에 젖어 무릎 위에 놓고 신주 모시듯 했다”며 이 내용을 발표하던 역사적인 목소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세인들은 그를 자연의 길, 곡선을 닮았다고들 한다.

 

굽이굽이 시련과 조화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주경야독으로 중앙일보 기자에 입성하기까지가 그렇고,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이 그렇지 않는가.

 

당시 인터뷰를 했던 기자는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언론 문제, 해직기자, 정치까지 다양한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고 언급했다.

 

/편집자 주

 

-기자 출신이다. 어떻게 기자를 하게 됐나.

 

“내가 기자가 된 것은 아버지 영향이 컸다. 10살 때로 기억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신문을 보다가 펑펑 우시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신익희 선생께서 대선 유세차 이리로 오다가 열차 안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많이 배우지 못하신 분이 신문 기사 하나에 비분강개하고 때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신문의 힘을 알았다. 가난한 농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신문의 공적인 역할에 주목했고, 그래서 기자가 됐다. 목표는 논설위원이었다. 기자 생활 20여년(해직생활 7년 포함)을 하면서 논설위원을 못한 게 아쉽다.(웃음)”

 

‘씨알의 소리’에 기고했다가 해직당할 뻔

 

-기자생활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경찰기자 시절이었다. ‘씨알의 소리’에서 글을 하나 써달라고 했다. ‘혼인 빙자 간음’이라는 글을 썼다.

경찰서 유치장에 혼인을 빙자한 간음으로 잡혀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걸 정치 현실에 비유했다.

‘민주주의 하겠다고 국민들에게 표를 받은 사람들이 막상 정권을 잡으면 민주정치는 않고 독재를 한다. 혼인을 빙자한 간음과 뭐가 다르냐’는 내용이었다.

잡지가 나오고 얼마 후 경찰서에서 기사를 쓰고 있는데 회사에서 호출이 왔다. 부국장이 빨간줄이 죽죽 그어진 잡지를 펼쳐놓고 물었다.

 

“네가 이 글을 썼냐?”

 

박준영 전 전남지사

“네….”

 

“정부에서 사표를 받으라고 한다.”

 

“….”

 

“글은 잘 썼는데, 외부 언론매체에 기고한 글이라 회사가 책임질 수 없다.”

 

“알겠습니다.”

 

며칠 후 다시 불러 ‘새내기기자가 혈기로 쓴 것이니 한번은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없던 일이 됐다’며 주의를 줬다. 가까스로 해직을 모면했다.”

 

-두 번은 피할 수 없었나 보다. 80년 5·18 직후중앙일보에서 해직됐는데.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5월18일 광주항쟁이 일어났는데 한 줄도 보도할 수 없었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하는 보도만 나갔다.

왜곡보도를 더 이상 할 수 없어 중앙일보 기자들은 5월20일부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차장급 이상 간부들이 신문을 제작하는 바람에 당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럴 바에는 제작에 참여해서 광주항쟁의 진상을 제대로 알리자고 했다. 그때 기사에 주어가 없는 문장들이 나왔다. ‘폭도’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광주는 계엄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7월 중순쯤 회사에서 사표 제출을 강요했다.

미리 인쇄된 사직서 용지에 내 이름을 적어 넣으며 ‘이건 오래가지 못하는 역사다’라는 생각을 했다. 7월31일 회사는 나를 포함해 33명의 사표를 선별수리했다. 검열거부와 제작거부에 적극 참여했거나 광주취재를 다녀온 기자들이었다.”

 

“언론인 해직 야만적…빨리 복직시켜야”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대도 아닌데 해직기자가 16명이나 있다. 특히 YTN 기자들은 6년째 해직상태다.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기자들에게 펜과 마이크를 빼앗은 것은 비민주적이고, 야만적이다. 해직의 고통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나도 경험했지만 생활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게 만든다. 빨리 복직시켜야 한다.

해직자들도 복직의 희망을 잃지 말고 어디에 있든 언론인의 소명을 다한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87년에 중앙일보로 복직한 이후 8년 정도 기자를 하다가 회사를 그만뒀다. 40대 후반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언론계를 떠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사내 문제가 컸고, 어차피 그만둘 경우 학교로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학에서 3과목을 강의하기로 했는데, 당선자 신분인 김대중 대통령께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왔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알게 된 것은 1971년 대선 때다.

당시 복학생인 나는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전쟁을 하지 않고도 평화적으로 통일을 할 수 있다’는 3단계 통일론 공약을 접했다.

학교 담벼락에 쓰인 ‘무찌르자 공산당’ ‘북진통일’ ‘때려잡자 김일성’ 등 구호를 보고 성장한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그런 충격을 주신 분의 뜻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면 나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박준영 전 지사는 1998년 2월 국내언론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공보수석 겸 청와대 대변인, 국정홍보처장을 하며 국민의 정부 5년간 김대중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김대중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정계은퇴 후 뉴욕에 왔던 김대중 대통령이 뉴욕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 특파원 마치고 부장하고 있을 때 남북문제 전담하는 부장들과 대화하자고 해서 뵌 것이 전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업적 중 특히 박 전 지사께서 가장 크게 생각하는 부분은.

 

“기초생활보장법과 IT산업 육성이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국가는 국민들에게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실천했다.

최저생계비 이하 저소득층의 기초생활 보장을 위해 4인 가족에 90여만원을 보장했다. 탈세 방지를 위해 신용카드를 보급하면서 늘어난 세수로 재원을 충당했다.

대한민국 사회보장제도의 기초가 그때 닦여졌다. 대통령께서는 ‘산업화에 뒤진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IT를 해야 한다’며 벤처 및 IT산업을 적극 지원, 육성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IT강국이 될 수 있었다.”

 

박 전 지사는 인터뷰 도중 언론인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했다. 고맙다는 말도 여러 차례 했다. “언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언론이 오피니언레이트 돼 있다. 여론을 주도하는 데만 매몰돼 있다.

그러나 독자가 원하는 것은 팩트다. 언론은 팩트를 제공하고 독자에게 맡겨야 한다. 사실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상기 기사는 지난 2014년 9월 기자협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인터뷰 당사자인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의 허락을 받아 재편집한 것임을 밝힙니다.

 

/정리=장봉선 기자